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문단 편집) === 비판에 대한 반론 === * 매관매직 동양에서 이런걸 했다가는 나라 망칠 짓 취급받을 것이고, 실제로 이를 공식적으로 시행한 [[후한]]의 [[영제(후한)|영제]]는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허나 이는 동•서양의 차이를 감안해야 하는데 동양은 무려 한나라 시절부터 공식적인 인재 등용 제도가 있었고, 당연히 영제 시기에도 그 제도대로 인재를 뽑는게 원칙이었다. 즉 영제는 멀쩡히 제도와 원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관매직이라는 방법을 썼기에 욕을 먹는 것이며, 또 그렇게 매관매직한 결과도 좋지 못해서 더 욕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마땅한 인재 등용 제도가 없었다. 기껏해야 추천이나 세습 정도가 전부였다. 즉 [[세습]]이나 [[천거]]같은, 동양에서는 빠르면 7세기, 늦어도 10세기에는 벗어난 방식을 '''이 때는 물론 그 이후에도 쓰고 있었다.''' 유럽에서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다는 발상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보고 떠올린 발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매관매직은 나름대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습은 혈통이 중시되고 추천도 어쨌든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루어지므로 소위 [[고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매관매직은? 돈이 있으면 직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존 신분 외의 사람들도 등용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매관매직으로 돈이 뽑혀나간 사람들이 백성을 수탈하거나 할 수 있겠지만 '''수탈하는데는 귀족도 왕도 피장파장이었다.''' 그래서 사실 진짜 순수 매관매직만 했다면야 나름대로 그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계속 돈 들고 도전해와서 나름대로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되는 등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세습권의 판매'''였다. 세습권까지 나오니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세습이 가능하게 되었고, 결국 세습제가 실상 그대로 유지된 꼴이 되었다. 차라리 순수 매관매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군대는 계급을 매관매직으로 구매해야 승진이 가능했다. 영국은 순수 매관매직으로만 승진이 가능했고, 가격도 귀족이 지불하기에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장교들은 나름 열심히 싸웠다. 몇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획득할 경우, 한몫 단단히 잡고 그걸 바탕으로 승진값도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국의 매관매직 제도는 [[크림 전쟁]]에서 문제점을 노출하게 되었고 폐지하게 된다.] * 호색한 당대 군주들 치고 정부가 없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없는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를 받던 시대였다. * 미화인가? 결론적으로 보면 앙리 4세에 대한 평가가 미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대의 평가일 뿐이다. 당대 종교인들에게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귀족들에게는 권력 강화에 힘쓰며 국민들에게는 사생활은 문란하고 세금을 많이 걷으며 매관매직에 열을 올렸으니 '''어느 누구도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리 4세가 즉위하기 전, 프랑스는 40년 가까이 종교적인 이유로 위그노 전쟁이라는 참혹한 내전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위그노들의 파워가 루이 14세때가 되어서야 겨우 사라지는 걸 감안하면 앙리 4세로서는 어느 한쪽 편에만 설 수 없는 노릇이었고, 왕으로서 권력을 강화하는 것과 그에 따라 귀족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으며, 매관매직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또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인재 등용법인 만큼 부르주아처럼 돈은 있지만 귀족과의 혈연도 없고, 인맥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을만한 면도 있었으며, 사생활은 앙리 4세가 좀 심한 면이 있지만 '''다른 왕들이라고 사생활이 깨끗한 건 아니었다.'''[* 이보다 50년 후의 일이지만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3대 왕 [[찰스 2세]]는 정부가 14명이나 되었고, 그 정부들 사이에서 본 사생아들만 해도 13명이나 되었다. 비슷한 시기의 폴란드 베틴 왕조의 왕 [[아우구스트 2세]]는 아예 사생아들이 너무 많아서, 모르고 잔 여자가 사실은 자신의 친딸이라는 악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물론 이 둘도 특별히 호색한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호색한이라면 이 정도는 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심하게 비방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나마 세금 인상 정도가 욕을 먹을 수 있겠지만 주구장창 헛된 전쟁만 하느라 세금을 과중하게 물린 후대의 왕들에 비하면 낫다. 실제로도 앙리 4세 시기는 위그노 전쟁을 거친 만큼 후대의 왕들보다야 세금을 거두어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필요성은 있었다. 결국 당대 입장에서는 앙리 4세는 미움받기 딱 좋은 왕이었지만 후대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위그노 전쟁의 혼란을 종식하고 수습한 명군으로 보일 수 밖에 없고 가장 중요한건 '''후대의 평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